[박혜진 서강대학교 AI⋅디지털자산 주임교수] 대한민국 디지털 자산 시장에 거대한 변화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오랫동안 빗장이 걸려있던 디지털자산 공개(ICO)가 2026년 허용될 것으로 보이고, 토큰증권(STO) 역시 제도권 안착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관망세에 머물렀던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들이 본격적으로 시장 진입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단순히 법적 규제가 풀린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기업들이 마주할 진짜 도전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협업'이라는 낯선 문법을 익히는 데 있다.


전 세계 자본시장의 공룡인 블랙록(BlackRock)의 행보를 주목해 보자.


그들이 운용하는 토큰화 펀드인 'BUIDL'은 단순히 블랙록의 브랜드 파워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 블랙록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들려 하지 않았다. 대신 블록체인 기술 스타트업인 '시큐리타이즈(Securitize)'와 손을 잡았고, 이더리움을 비롯한 7개의 서로 다른 블록체인 네트워크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생태계에 스며들었다.


블랙록은 왜 ‘남의 배’에 탔을까


블랙록 같은 거대 자본이 왜 작은 스타트업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오픈 네트워크인 퍼블릭 블록체인을 선택했을까? 대답은 명확하다.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자산 시장은 '독점'이 아닌 '연결'을 통해 가치가 창출되는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인프라는 스타트업이 제공하고, 네트워크는 커뮤니티가 관리하며, 자산의 신뢰는 금융기관이 보증하는 융합의 결과물이 바로 디지털자산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체질은 이와 정반대에 가깝다. 우리 산업계는 지난 수십 년간 '수직 계열화'와 '하청 구조'에 최적화되어 왔다.



사진=연합뉴스

'상전'과 '하청'에 익숙한 대한민국 기업의 관성


필요한 기술이 있으면 직접 인력을 채용해 '내재화'하거나, 중소기업을 하청 구조로 편입시켜 파견 인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유망한 스타트업을 파트너로 인정해 M&A를 하거나 대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우하는 문화는 여전히 척박하다.


그러나 디지털자산 시장은 이런 '갑을 관계'의 문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전 세계 기술자들이 오픈 소스로 경쟁하며 협력한다.


거대 조직이 모든 기술 변화를 직접 따라잡으며 시스템을 직접 빌드하겠다는 생각은 오만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의 극치를 낳는다. 지금 대기업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직접 만들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누구와 손잡고 이 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유연함이다.


생태계 꼭대기가 아닌 '내부'에 위치하라


기업과 금융기관은 자신들이 생태계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태계를 구성하는 여러 점 중 하나임을 자각해야 한다.


부족한 기술과 인프라를 파악했다면, 이를 하나하나 직접 개발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 이미 검증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대우하며 파트너십을 맺어야 한다.


좋은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을 단순히 용역업체로 부리는 훈련이 아니라, 그들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고 함께 수익을 나누는 비즈니스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


스타트업이 가진 민첩한 기술력과 개방성이 대기업이 가진 자본 및 신뢰와 결합할 때, 비로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디지털자산 인프라가 탄생할 수 있다.


폐쇄성은 리스크다: 2026년, 금융 혁신의 진짜 변수


ICO와 STO가 본격화되는 2026년, 승패의 기준은 ‘자본’의 크기가 아니라 ‘연결’의 깊이다. 지금까지의 경쟁이 독식과 소유의 역사였다면, 앞으로는 가장 넓고 단단한 ‘협력망’을 구축한 조직이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하청’과 ‘종속’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폐쇄적인 내부 시스템과 독점적 지식만으로는 복잡하게 진화하는 생태계의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이제는 남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유연함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결국 관건은 기술도 예산도 아닌 ‘관점의 변화’다. 스스로를 열어 생태계와 호흡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수백조 원의 투자도 잘 짜여진 법제도도 공허한 구호에 그치고 만다. 폐쇄성은 리스크가 되고 개방성은 전략이 되는 이 시점, 2026년이 조직의 명운을 가르는 조용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출처 : 오피니언뉴스(http://www.opinionnews.co.kr)